
박효영 변호사
추진위원회가 선정한 정비업체와의 용역계약을 둘러싼 다툼은 정비사업 초기에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분쟁이다. 정비업체는 조합이 설립되면 그 계약이 당연히 조합으로 이어진다고 여긴다. 반면 새로 들어선 조합 집행부는 ‘추진위가 한 계약은 우리와 무관하다’며 용역비 지급을 거부하거나 업체 교체를 시도한다. 추진위 단계의 용역계약은 조합에 그대로 승계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법원은 이를 제한적으로 본다.

계약의 조합 승계 범위
일각에서는 정관에 승계조항이 있거나 총회에서 추인했으니 계약 전부가 당연히 조합으로 넘어간다고 본다. 그러나 법원의 시각은 다르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시정비법’)이 추진위와 조합의 권한을 엄격히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제32조는 추진위의 업무를 정비업체·설계자 선정, 개략적 시행계획서 작성, 조합설립인가 준비 등으로 한정한다. 추진위는 어디까지나 조합설립을 ‘준비’하는 기구다. 반면 사업시행계획·관리처분처럼 사업을 실제로 시행하는 일은 조합의 몫이고, 정비업체의 선정·변경은 제45조가 조합 총회의 고유 의결사항으로 못 박는다.
그래서 추진위가 자기 권한을 넘어 조합 고유의 업무까지 미리 묶어 계약하면, 그 부분은 월권이 된다.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2024. 8. 22. 선고 2023가합100723 판결은 ‘이 사건 계약 중 조합설립 이후의 조합 업무에 관한 부분은 강행규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판시했다. 이 법리는 한 사건의 판단에 그치지 않는다. 추진위가 권한 밖의 업무까지 끌어다 맺은 계약은, 설령 정관에 승계조항이 있더라도 그 부분만큼은 무효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대구고등법원 2023. 11. 15. 선고 2022나25821 판결 역시 조합업무에 관한 용역계약은 추진위 업무범위 밖이라고 보아 같은 결론에 섰다.
추인의 요건과 시점
그렇다면 정비업체는 계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길은 조합 총회의 추인이다. 추인은 무효가 될 수 있는 행위를 나중에 인정해 유효로 굳히는 의사표시다. 다만 실무에서 추인이 가장 자주 깨지는 지점이 바로 시점이다.
추인은 조합이 설립인가를 받고 설립등기까지 마쳐 법적 실체를 갖춘 뒤의 총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설립 전 창립총회에서 정비업체 선정을 의결해 두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보면 오산이다. 앞의 안양지원 판결은 창립총회 의결만으로는 유효한 추인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직 법인격이 없는 단계의 결의로는 기존 계약의 하자가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울북부지방법원 2024. 5. 23. 선고 2021가합22422 판결은, 설립인가 후 임시총회에서 ‘정비업체 선정 및 계약 추인의 건’을 명확히 상정해 가결한 사안에서 추인을 유효로 인정했다. 조합원들이 그 계약이 무효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효과를 조합에 귀속시키려는 의사로 결의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실무상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안건의 문구다. ‘기 수행업무 추인의 건’처럼 뭉뚱그리지 말고, ‘추진위가 선정한 ㈜○○ 정비업체와의 용역계약을 조합이 추인하는 건’으로 계약 상대방과 내용을 특정해 상정해야 한다. 그래야 조합원이 무엇을 추인하는지 알고 의결한 것이 되어, 나중에 ‘내용을 모르고 찍었다’는 공격을 막을 수 있다.
무효인 경우의 용역비
조합이 승계를 거부하고 추인도 없었다면, 정비업체는 그동안의 노력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계약이 무효라도 한쪽이 법률상 원인 없이 이익을 얻었다면 돌려주어야 한다. 서울고등법원 2024. 7. 5. 선고 2023나2014405 판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비업체의 책임 없는 사유로 용역 제공이 불가능해진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아 민법 제538조 제1항을 적용해 조합설립인가 단계까지의 용역 대가 전액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이런 무귀책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실제 수행해 조합이 이익을 얻은 업무가 있다면 그 기여도에 상응하는 보수를 부당이득으로 청구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다만 그 기여도를 얼마로 볼 것인지를 두고 다시 다툼이 생겨, 결국 감정으로 가치를 가리는 경우가 많다.
포괄승계의 범위와 한계
승계의 근거는 법에 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34조는 추진위원회가 수행한 업무와 그에 관련된 권리·의무를 조합이 포괄승계하도록 정하고 있다.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정비업체)나 설계자의 선정은 추진위원회의 법정 업무에 속하므로, 그 범위에서 체결된 계약은 원칙적으로 조합에 승계된다.
문제는 ‘업무범위’다. 포괄승계의 대상은 추진위원회가 그 권한의 범위에서 적법하게 행한 업무에 관한 것에 한정된다. 추진위원회가 권한을 넘어 조합 고유의 업무까지 미리 계약으로 묶어 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의 권리·의무는 승계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하급심의 판단은 이 지점에서 갈린다. 정비업체 선정 자체는 추진위원회의 기능이므로 승계가 제한되지 않는다고 본 예가 있는 반면, 용역계약 중 조합 단계의 업무에 해당하는 부분은 포괄승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예도 있다.
따라서 계약의 운명은 계약서의 업무 범위가 추진위원회 단계에 머무는지, 아니면 조합 단계의 업무까지 끌어다 정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계약을 검토할 때에는 ‘무엇을, 어느 단계의 업무로’ 정하고 있는지를 먼저 가려야 한다.
승계와 재선정은 다른 문제다
승계가 인정된다고 하여 모든 후속 계약이 자동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공자의 선정은 조합이 설립된 뒤 총회의 경쟁입찰을 거치는 것이 원칙이다(도시정비법 제29조). 추진위원회 단계에서 정비업체의 지위가 승계되더라도, 시공자 선정은 별도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정비업체와 설계자의 계약이 승계되는지(승계의 문제)와, 조합이 새로 사업자를 선정하여야 하는지(재선정의 문제)는 층위가 다르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승계가 인정되는 계약을 두고도 불필요하게 재선정 분쟁을 일으키거나, 반대로 경쟁입찰을 거쳐야 할 사항을 승계로 갈음하려다 절차 위반에 이르게 된다.
체크리스트
정비업체·설계자 측은, 계약의 업무 범위를 추진위원회의 법정 업무 안에서 명확히 한정하고, 조합 설립 후에는 총회의 추인 결의를 거쳐 승계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추인 안건은 ‘기 수행 업무의 추인’과 ‘향후 업무의 위임’을 나누어 문구를 정밀하게 작성하는 것이 안전하다.
조합 측은, 승계를 주장하거나 거부하기에 앞서 계약의 업무 범위가 추진위원회 권한 내에 있었는지를 먼저 검토하여야 한다. 권한을 넘은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한하여 효력을 다투되, 이미 제공받은 용역에 대해서는 부당이득 또는 상당한 보수의 정산 문제가 남는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추진위 계약의 운명은 거창한 법리가 아니라 계약서 문구와 총회의 시점·안건에서 갈린다. 추진위는 애초에 업무범위를 조합설립 준비로 한정해 계약하고, 정비업체는 조합 설립 이후 곧바로 안건을 특정한 추인 결의를 받아 두어야 한다. 조합 역시 추인 안건을 명확히 상정해 조합원의 알 권리를 채워야 뒤탈이 없다. 이 단순한 두 가지를 놓치면 수억 원의 용역비가 무효와 부당이득의 회색지대로 떨어져, 결국 감정과 소송으로 이어진다. 관련 분쟁을 앞두고 있다면 계약서와 총회 의결 경위를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